카비루스종파와 황제숭배종파
첫째,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리스도신앙과 유사한 카비루스신앙을 갖고 있었다. 데이 종파는 권리박탈자들을 변호하다가 자신의 두 형제에게 살해된 카비루스(Cabirus)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왕권의 상징물들과 함께 매장되었고, 그 종파는 그를 순교한 영웅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하층민들은 카비루스가 생전에 기적을 행하였고, 때때로 은밀히 환생하여 사람들을 돕는다고 믿었으며, 장차 재림하여 하층민들에게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고, 도시를 지난날의 독립과 영광에로 회복시켜 줄 것으로 믿었다. 이처럼 카비루스종파는 억압받는 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줬는데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희망과 유사한 것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카비루스종파의 예배가 카비루스의 순교를 기념하는 피의 제사였다는 점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서 쓴 것처럼,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의 피에 참여함”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났고, 계급의 구별을 없앴다. 카비루스종파에서는 모든 사회계급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둘째, 아우구스투스 치하 때 카비루스종파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황제숭배가 도입되었고, 헬라인들은 카비루스가 카이사르의 몸으로 환생했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지배 권력이 억압당하는 자들의 희망을 울안에 가둬버린 격이 되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의 영적생활은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에게 더 이상 위안이 되지 못했고, 평민들은 참 종교를 갖지 못한 채 공백상태로 남았다. 그로 인해서 진짜 카비루스를 닮은 자가 도시에 나타난다면 체제에 즉각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황제숭배종파는 로마제국을 통틀어 국교가 되었다. 황제숭배는 로마가 가져다준 평화와 안정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시작되었으나 주전 44년 율리우스 시저가 암살되자 상황이 바꿨다. 시저가 암살된 다음 로마의 밤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는데, 로마인들은 이 현상을 시저의 영혼이 사후세계로 옮겨간 현시라고 믿었다. 주전 42년 제2차 삼두정권(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은 율리우스 시저를 신격화하였고, 신전을 건축하여 그를 기렸다. 혜성이 부조된 율리우스 신전(Temple of Divus Julius)은 시저 숭배의 상징물로써 데나리온에도 장식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이후로는 황제들의 생전에 그들을 위한 신전들이 건립되었고, 결과적으로 황제숭배는 민중의 충성도를 시험하는 잣대로 돌변하였다. 이 사악한 덫에 우상숭배를 거부한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걸려들었다.
'데살로니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전 4:11 (0) | 2019.09.02 |
---|---|
포기할 수 있는가? 살전 1장 (0) | 2019.08.31 |
데살로니가전서 1장 묵상 (0) | 2019.08.27 |
데살로니가서 개론 (0) | 2019.08.26 |